엘림넷-하이온넷 소송은 한국 법원에 GPL이 최초로 등장한 사건이며, 더군다나 1심 판결이 GPL을 무시했다는 점 때문에 사건 자체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게 어떤 사건이었으며 무슨 판결이 나왔는지는 모르며 그저 “GPL은 법적 효력이 없다더라”는 소문만 떠도는 실정이죠. (스포일러: 그런 결론은 아닙니다.)

사건 자체는 위키백과 문서에 간략히 요약되어 있고, GNU Korea 문서에도 1심까지의 자료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전체적인 사건의 흐름을 살펴보고, “그래서 GPL의 법적 효력은?”도 알아보겠습니다.

GPL?

GPL(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은 저작물을 이용하기 위한 허가서로, 쉽게 말하면 계약서입니다. 프로그램을 배포하는 측에서 받는 측에게 ‘이런 조건 하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라고 허가해주는 것이죠. 가령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윈도를 구입해서 설치할 때, 우리는 윈도에서 제시하는 계약서에 동의 버튼을 누릅니다. 그 계약서에는 프로그램을 복제해서 아무에게나 사람에게 주면 안 된다는 내용이 써 있겠지요.

GPL을 비롯한 자유 소프트웨어(free software)나 오픈 소스(open source) 역시 계약서로 이루어집니다. 다만 GPL 계약서에는 대충 다음과 같은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 이 계약서를 받은 사람은 소스 코드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못 받았으면 달라고 요청하세요.
  • 소프트웨어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됩니다.
  • 소스 코드를 고쳐도 됩니다. 단, 그렇게 고친 소프트웨어를 다른 사람에게 줄 때는 GPL로 계약해야 합니다.

(물론 실제 GPL 라이선스는 이보다는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세 번째가 GPL의 핵심이며, “전염성”을 가지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소스 코드를 수정하는 경우 그 부분에 대한 2차적 저작권이 발생합니다. 원래 코드의 저작권도 유효하지만, 새로 수정된 부분은 저작자가 권리를 가지겠죠. GPL 계약은 여기에 “2차적 저작권도 GPL로 배포할 것”이라는 조건을 걸어두기 때문에 결국 수정된 프로그램 GPL로 배포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원저자와의 GPL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 됩니다.

VTun, ETun, 소송

VTun은 가상 터널링을 어쩌구저쩌구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하며, 중요한 건 GPL 2 이상으로 배포된다는 점입니다.

개발자 H는 VTun에 약간의 코드를 추가하여 ETun이라는 제품을 만드며, 이걸 들고 엘림넷에 입사합니다. 엘림넷은 ETun을 순수 회사 자산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VTun의 GPL 계약을 위반한 물건이었습니다.

이후 H는 엘림넷을 퇴사하며 ETun을 하이온넷이라는 회사로 가져갔고, 조금 더 수정하여 “HL”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ETun과 마찬가지로 HL 역시 VTun의 GPL 조건을 위반한 제품이었으며, 엘림넷이 소유하고 있던 ETun의 수정 사항 역시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이에 엘림넷은 개발자 H가 ETun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2005년 3월 하이온넷에 형사 및 민사 소송을 걸게 됩니다. (정확히는 ETun과 함께 고객 정보 등의 자료를 함께 들고 갔습니다. 이 부분은 이 글에서는 생략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GPL의 법적 여부”를 따질 사건은 아닙니다. 그건 이 소송의 핵심이 아닙니다! 법원이 판단해야 하는 부분은 엘림넷이 ETun의 (VTun 부분을 제외한) 저작권을 가지는가, 그렇다면 그 프로그램을 하이온넷으로 가져간것은 영업비밀 유출이 성립하는가입니다.

비유하자면 엘림넷은 외국 책을 무단 번역해서 판매하고 있었고 하이온넷은 그 번역을 무단으로 가져가서 쓰고 있었던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엘림넷은 원저자의 저작권을 침해했지만 하이온넷은 엘림넷의 저작권을 침해한 게 될 겁니다.

GPL 변수와 FSF의 개입

이때 개발자 H는 ETun이 GPL로 배포되고 있으며 따라서 ETun이 영업비밀이 될 수 없다고(따라서 프로그램 유출 죄는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양측의 주장이 서로 달랐는데, 엘림넷은 자신들은 ETun이 GPL 프로그램 기반인 줄 몰랐다고 주장했으며 H와 하이온넷은 엘림넷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엘림넷의 주장에 따르면 개발자 H는 ETun 소스 코드조차 회사에 넘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이후 개발자 H의 사과문에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즉, 이 사건은 개발자 H가 GPL을 도용하여 회사를 속인 후 나중엔 다른 회사로 가져간 사건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양측의 주장이 서로 엇갈렸고 당사자 외에는 진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개발자 H는 자유소프트웨어재단(FSF)에 연락하여 이 사건을 알립니다. 이에 FSF는 소송과 별도로 GPL 위반 부분에 대해 양 측의 침해 여부를 조사합니다. 문제는.. FSF는 처음에는 엘림넷이 GPL 코드를 영업비밀이라고 주장한다고 추정하였지만 최종 판결에서 보이는 그림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당시 FSF의 입장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ETun과 HL 모두 VTun의 GPL 계약을 이행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ETun은 GPL로 배포되어야 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영업비밀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논점은 GNU Korea가 엘림넷 및 하이온넷에 각각 GPL 위반에 대한 조치를 요청하고 두 회사 모두 이를 받아들이면서 정리됩니다. ETunHL은 GPL로 배포되고, 엘림넷의 합의문과 하이온넷의 GPL 위반 사과문 역시 공개됩니다.

엘림넷 합의문을 보면 FSF는 ETun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고 한 부분이 있습니다. 엘림넷-하이온넷 소송과 별개로, ETun이 VTun을 도둑질했다는 부분 역시 법정에 설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경우 원고는 VTun 개발자, 피고는 엘림넷이 되겠고 진짜 “GPL의 법적 여부” 판례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나오겠죠. FSF는 그런 무의미한 다툼 대신 GPL 위반에 대한 조치를 얻어내는 상호 합의로 마무리짓습니다. (대부분의 GPL 위반 사례는 이렇게 판례 대신 합의로 마무리됩니다.)

두 번째 논점은 ETun이 GPL로 배포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영업비밀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인데, 실제 정황은 ETun은 엘림넷 입장에서 GPL을 갖다 쓴 것인지도 몰랐던 “상용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며 이는 FSF의 처음 전제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꼬여버린 사건은 형사 1심 판결로 인해 더욱 전설이 됩니다.

형사 1심

2005년 9월 8일에 1심 판결(2005고단2806)이 선고됩니다. ETun의 영업비밀 유출이 인정됩니다.

이 판결이 전설로 전해지는 이유는 다음의 구절 때문입니다.

… 이른바 오픈소스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자유소프트웨어재단의 GPL 라이센스 규칙이 이 사건에 있어서 어떠한 법적 구속력이 있다 할 수 없으므로, 결국 피고인들의 주장은 이유 없다.

이 부분이 바로 “GPL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않는다더라”는 소문의 근원입니다. 심지어는 FSF의 개입을 “압력”으로 해석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피고인들은 … 자유소프트웨어재단이라는 단체로 하여금 법원의 재판에 압력을 행사하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엄벌에 처하여야 마땅함.

하지만 사실 이 판결을 완전히 GPL을 무시하는 판결로 볼 수도 없습니다. 판결의 핵심은 ETun이 VTun에 추가적인 작업이 들어간 별도의 프로그램이라는 점입니다.

(피고인 한oo 스스로도 검찰에서 ETUND 중 새로운 아이디어가 추가된 부분은 엘림넷의 소유라고 생각한다고 진술하였고, 피고인 박oo도 검찰에서 엘림넷의 기술을 이용한 것이 개발기간을 2개월 정도 단축한 효과는 있다고 진술하였음)

이렇기 때문에 피고인들의 주장(ETun이 VTun 기반이며 GPL이다)을 “이유 없다”라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이 구도는 당시 FSF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던 구도와는 달랐고, 마치 ETun이 GPL로 배포되는 소프트웨어인데 법원에서 그 라이선스를 무시한 것 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개발자 H가 형량을 줄이기 위해 ETun이 (소송 당시) GPL이라고 주장한 부분이 FSF를 비롯한 자유 소프트웨어 진영에 오판을 일으켰고 이게 GPL 소문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FSF의 개입을 압력 행사로 해석한 것 역시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단어 선택에 있어서는 이상한 부분이 많습니다. 판결문은 적어도 GPL이 무엇인지, 그리고 ETun이 VTun을 이용할 때 GPL을 위반하였는지에 대해 사실관계를 언급해야 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판사가 정말 GPL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을지 의심스럽게 만드는 판결임에는 분명합니다.

해당 소송은 3심까지 진행됩니다. 2심과 3심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형사 2심과 3심

2심 판결(2005노3002)이 2006년 11월 1일 선고됩니다. 3심 판결(2006도8369)이 2009년 2월 12일 선고되며 논점은 2심과 같습니다. 2심/3심 역시 ETun의 영업비밀 유출이 인정되며, 1심보다 훨씬 정확하게 논점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법원에서는 ETun이 VTun에 추가적인 수정이 들어간 2차 저작물이며, 즉 VTun에는 ETun의 원 저작권과 함께 엘림넷의 저작권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다른 회사에 들고 간 것은 엘림넷의 저작물을 유출시킨 것이 됩니다. 물론 ETun 자체는 VTun의 저작권을 침해했지만, 그건 이 엘림넷-하이온넷 소송에서 다룰 게 아니기 때문에 판결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3심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 비록 공소외 주식회사가 ETUND 1.04 원시코드의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GPL을 위반하였다고 하더라도, 공소외 주식회사가 VTUND의 저작권자에 대하여 그로 인한 손해배상책임 등을 부담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

2심과 3심은 GPL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해당 소송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GPL은 법적 효력이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자유 소프트웨어나 오픈 소스의 법적 효력 여부는 사실 먼 옛날에 논란이 끝난 사항입니다. FSF의 Eben Moglen이 쓴 “GNU GPL은 법적 강제성을 갖고 있는가?”는 무려 2001년 글이죠. (당시 GPL을 공격하던 MS는 지금은 앞장서서 오픈 소스의 흐름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GPL은 저작권법을 전제로 하는 저작권 계약입니다. 이 계약에 효력이 없으려면 계약 내용이 국가 법상 불가능하거나 하는 근본적 문제가 있어야겠죠. GPL은 (한국을 비롯하여) 많은 국가가 공유하는 저작권 개념을 이용하기 때문에 “GPL의 법적 효력” 자체를 의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GPL은 실제 재판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이것은 사실 판례를 보는 것 외에는 답을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GPL 위반이 발견되었다고 하더라도 소송까지 가는 것보다는 합의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판례가 나오려면 대형 사건이 나와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등에는 여러 소송 사례가 있지만 한국 법정에서 GPL이 등장하는 사례는 아직까지는 엘림넷-하이온넷 사건이 유일할 겁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C) 역시 비슷한 입장입니다. 사실 CC 2.0의 경우는 아예 국가별로 라이선스를 따로 만들기도 했는데, 과거 CC 비영리를 다루는 글에서 다뤘던 CC-BY-NC-2.0-kr도 한국어로 되어 있죠. 이 문서는 단순한 한국어 번역문이 아니라, 해당 허가서 전체가 대한민국 법률을 따르도록 재조정된 것입니다. 허가서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것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7.f. 본 이용허락은 한국어에 의하여 제공되며, 본 이용허락의 영문판은 한국어판을 해석하는 자료가 되는 것에 불과하며 한국어판과 영문판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한국어판이 우선합니다.

  1. 본 이용허락은 한국법에 의하여 규율되며 이에 근거하여 해석됩니다.

한편 한국판의 근간이 되는 CC-BY-NC-2.0 unported를 살펴보면 이건 미국 법을 기준으로 하죠.

4.d.ii. … subject to the compulsory license created by 17 USC Section 115 of the US Copyright Act (or the equivalent in other jurisdictions) …

그렇다고 해서 이게 한국 법상 효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CC 2.0의 국가별 라이선스의 의도는 미세 조정을 통해 법적 효력을 높이려는 것이었겠지만, 실제로는 가짓수를 복잡하게 만들며 오히려 특정 국가에서만 특정 추가 조항이 들어가기도 하는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따라, 이후 버전에는 특정 국가 버전을 잘 만들지 않게 되었으며(한국어는 2.0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나온 CC 4.0에는 현재 특정 국가 버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냥 글로벌 버전을 쓰는 것을 권장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자유 소프트웨어/오픈 소스 라이선스는 법적 효력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심지어 대한민국 정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를 근간으로 하여 공공누리라는 라이선스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라이선스는 공공기관이 만든 저작물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CC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공공누리 역시 비슷한 운명에 빠지게 될텐데, 그러한 시나리오보다는 CC가 전세계적으로 법적 효력이 있는 시나리오가 훨씬 설득력이 있겠죠?